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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인 불명

https://youtu.be/_fd_hwSm9zI?si=MdukS1F3tB8PxCJ4 진동과 함께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비닐 팩 하나에 담겨있는 까맣고 걸쭉한 액체를 컵에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맛이었다.좋은 것들만 넣어 달였다는데. 왜 몸에 좋은건 이토록 쓴 지, 먹을 때마다 적응 안 되는 맛을 이겨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이미 손은 서랍 안에서 사탕을 찾고 있었다.다급하게 입에 밀어넣고 5초, 달큰한 사과향이 목과 코로 넘어오면 그제서야 깊은 숨을 들이내 쉰다.뉘엿 해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 옆에 걸터앉는다.여름의 끝물인 지금. 해가 지면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을 오싹하게 훔쳐간다.거리의 사람들은 제각기의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

세 번째 여름 2025.01.20

틀린 그림 찾기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더라도 누가 만드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게 음식 맛이었다. 소위 말하는 곰손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간편 조리법이야 유튜브나 블로그를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건져낼 수 있었지만 누군가 만들어주었던 음식 맛을 그리면서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칼 잡는 걸 업으로 삼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미 말은 다 했을 것이다. 종종 과일과 야채를 박스로 보내주시던 외가댁에서 이번에도 뭔갈 보냈다는 연락에 그저 평소처럼 한 두 박스 정도를 예상했던 어느 날. 하필 지방 훈련에 와있던 참이라 며칠 집 앞에 쌓여있을게 눈에 훤했지만 날이 덥지 않으니 상하진 않았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집에 올라올 남은 4일을 내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지냈지만. 그리고 바..

애물단지

"오일장 들어서는 날이던가?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데..""못 들었는가? 웬 장물아비가 왔다던데?""장물아비? 뭐.. 얼굴로 벌어먹는 양반인가. 아낙네들만 문전성시구만.""뭐라더라.. 서방에서 들여온 물건이라던데. 특이한 장신구라도 있는가 비-""흐음...~""왜? 안사람 사다 주려고? 같이 골라주랴?""응? 아, 됐네- 그 이.. 크흠, 부인은 저런 데에 영 관심이 없으이. 영 소탈해.""글쎄 반짝거리는 걸 싫어하는 여인네들은 없대도~ 가세 가세. 나중에 나한테 따악~ 감사할 일이 생길 것이야." 언젠가 신기한 물건들을 잔뜩 이고서 나타나 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던 장물아비란 작자는 한동안 마을에서 알음알음 화젯거리였더랬다. 서방에서 들여왔다는 물건들은 정말이지 죄다 처음 보는 생김새였고 그 모양도..

카테고리 없음 2024.12.13

s-24

"설마 이 날씨에 치마를 입고 나가려고?""이거 기모야." 옷장을 헤집다 못해 뒤집어엎었는지 침대도 모자라 바닥까지 빼곡하게 옷이 쌓여있는 광경은 참 개판이었다. 그 돼지우리에 발을 디뎠다간 복장이 터질라 문지방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귤이나 마저 까 입에 넣었다. "누구 만나는데? 누구더라 네 단짝인가 만난다고...""...""...야, 너 아니라매.""아, 아니라고!!" 염병하네. 어쩐지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없게 나돌아 다니나 싶더라니만. 어쭈 향수까지 뿌렸네 이거? "사귀는 거 아니라고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아직 사귀는거 아니야!""아직~? 아지익?""아, 꺼져. 가, 가!!" 친구의 연애사정에 사사건건 간섭할 마음은 없지만... 그냥 저 반응이 웃긴데 어떻게 참으라고. 준비를 다 끝냈는지 쿵..

스터디 2024.12.10

D-22

"순오 씨 여기 오기 전에 알바 했었댔나?""아, 네! 라이더 했었어요! 마켓x리랑 쿠x이츠요.""어쩐지 배우는 게 빠르더라. 포장은 하다 보면 느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일단 우린 스피드가 생명이니까.""네! 열심히 배울게요!""뭘 또 기합까지~ 우리야 한 철 장사니까 부담은 없지만.. 다들 기대하는 게 크니까." 초록색, 빨간색, 흰색 형형색색의 포장지. 리본과 레이스, 반짝이 풀과 씰링 왁스.컨베이어를 타고 내려오는 크고 작은 박스를 집어 올리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있고 저마다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포장을 하는 모양새와 다르게 얼굴에는 묘하게 지침과 사무적인 표정만 들어차있다. 성수기가 다가오는 요즘 야근은 일상이었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들의 유니폼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와펜들 덕에 마..

스터디 2024.12.03

단짝

https://youtu.be/qkGJJymr93s?si=gJiHiNA3BstuYy-Q    자그마치 삼 년만의 연락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은 어제도 널 보았지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빛 소식을 안고 귀국한 넌 이 좁은 나라에서 요즘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고. 이례적인 사건이라며 세계 각지에서도 네 이름과 사진을 포스터와 전광판에 띄우기 바빴으니까. 졸업하기도 전에 유학을 가겠다고 떠나더니 기어코 학교 정문에는 며칠 가지 않아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내걸리며 요란스럽게 널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분에 관계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너에게 말을 걸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그 영광스러운 손과 악수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와중에 학교 인터뷰며 행사며, 심지어는 이사장..

스터디 2024.11.26

0과 0

밤에는 자기 싫고 아침에는 더 자고 싶고, 주말에는 일찍 눈이 떠지고 주중에는 곧 죽어도 눈 뜨기 싫은. 현대인들 누구나 공감하는 불평과 희망사항은 주 5일, 아침 6시 반에 들숨날숨과 함께 자연스레 튀어나오곤 한다. 절기가 바뀌면서 아침 해도 늦잠을 자는 마당에 나는 왜 눈꺼풀에 피곤을 묵직하게 매달고서 억지로 일어나야 하냐며. 매일매일이 새롭게 피곤하고 새롭게 졸리운 이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뜰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 우스갯소리로 그런 소리들을 한다. 부스스 눈을 떴을 때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방 안을 채우고, 창 밖에선 새가 지저귀는 소리. 묘하게 개운한 몸부림 섞인 기지개를 켜고 있으면 어색한 평화가 곧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은 저를 침대 밖으로 내..

스터디 2024.11.22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평소 제 집 드나들듯 벌컥벌컥 열어재꼈던 보건실 문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지간히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말이라는 건 마음먹은 순간부터 긴장되는 일이 아니던가. 마냥 천사 같은 선생님을 속여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 그렇지만 내 최애의 출근길은 직접 보고 싶은 간절함. 두 감정 사이에서 옥신각신 고민하면서 꾹- 눈을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활동이 끝나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내 곁을 떠나야만 하는 최애의 남은 순간들을 최대한 눈에 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실물은 딱 한 번만 보기만 하면 만족하고 끝일줄 알았던 먼 옛날의 헛소리는 이미 집어던진 지 오래다. 실제로 보면 더 잘생겼는데 화면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스케줄 하나, ..

스터디 202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