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8

s-24

"설마 이 날씨에 치마를 입고 나가려고?""이거 기모야." 옷장을 헤집다 못해 뒤집어엎었는지 침대도 모자라 바닥까지 빼곡하게 옷이 쌓여있는 광경은 참 개판이었다. 그 돼지우리에 발을 디뎠다간 복장이 터질라 문지방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귤이나 마저 까 입에 넣었다. "누구 만나는데? 누구더라 네 단짝인가 만난다고...""...""...야, 너 아니라매.""아, 아니라고!!" 염병하네. 어쩐지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없게 나돌아 다니나 싶더라니만. 어쭈 향수까지 뿌렸네 이거? "사귀는 거 아니라고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아직 사귀는거 아니야!""아직~? 아지익?""아, 꺼져. 가, 가!!" 친구의 연애사정에 사사건건 간섭할 마음은 없지만... 그냥 저 반응이 웃긴데 어떻게 참으라고. 준비를 다 끝냈는지 쿵..

스터디 2024.12.10

D-22

"순오 씨 여기 오기 전에 알바 했었댔나?""아, 네! 라이더 했었어요! 마켓x리랑 쿠x이츠요.""어쩐지 배우는 게 빠르더라. 포장은 하다 보면 느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일단 우린 스피드가 생명이니까.""네! 열심히 배울게요!""뭘 또 기합까지~ 우리야 한 철 장사니까 부담은 없지만.. 다들 기대하는 게 크니까." 초록색, 빨간색, 흰색 형형색색의 포장지. 리본과 레이스, 반짝이 풀과 씰링 왁스.컨베이어를 타고 내려오는 크고 작은 박스를 집어 올리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있고 저마다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포장을 하는 모양새와 다르게 얼굴에는 묘하게 지침과 사무적인 표정만 들어차있다. 성수기가 다가오는 요즘 야근은 일상이었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들의 유니폼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와펜들 덕에 마..

스터디 2024.12.03

단짝

https://youtu.be/qkGJJymr93s?si=gJiHiNA3BstuYy-Q    자그마치 삼 년만의 연락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은 어제도 널 보았지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빛 소식을 안고 귀국한 넌 이 좁은 나라에서 요즘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고. 이례적인 사건이라며 세계 각지에서도 네 이름과 사진을 포스터와 전광판에 띄우기 바빴으니까. 졸업하기도 전에 유학을 가겠다고 떠나더니 기어코 학교 정문에는 며칠 가지 않아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내걸리며 요란스럽게 널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분에 관계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너에게 말을 걸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그 영광스러운 손과 악수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와중에 학교 인터뷰며 행사며, 심지어는 이사장..

스터디 2024.11.26

0과 0

밤에는 자기 싫고 아침에는 더 자고 싶고, 주말에는 일찍 눈이 떠지고 주중에는 곧 죽어도 눈 뜨기 싫은. 현대인들 누구나 공감하는 불평과 희망사항은 주 5일, 아침 6시 반에 들숨날숨과 함께 자연스레 튀어나오곤 한다. 절기가 바뀌면서 아침 해도 늦잠을 자는 마당에 나는 왜 눈꺼풀에 피곤을 묵직하게 매달고서 억지로 일어나야 하냐며. 매일매일이 새롭게 피곤하고 새롭게 졸리운 이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뜰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 우스갯소리로 그런 소리들을 한다. 부스스 눈을 떴을 때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방 안을 채우고, 창 밖에선 새가 지저귀는 소리. 묘하게 개운한 몸부림 섞인 기지개를 켜고 있으면 어색한 평화가 곧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은 저를 침대 밖으로 내..

스터디 2024.11.22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평소 제 집 드나들듯 벌컥벌컥 열어재꼈던 보건실 문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지간히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말이라는 건 마음먹은 순간부터 긴장되는 일이 아니던가. 마냥 천사 같은 선생님을 속여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 그렇지만 내 최애의 출근길은 직접 보고 싶은 간절함. 두 감정 사이에서 옥신각신 고민하면서 꾹- 눈을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활동이 끝나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내 곁을 떠나야만 하는 최애의 남은 순간들을 최대한 눈에 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실물은 딱 한 번만 보기만 하면 만족하고 끝일줄 알았던 먼 옛날의 헛소리는 이미 집어던진 지 오래다. 실제로 보면 더 잘생겼는데 화면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스케줄 하나, ..

스터디 2024.11.15

s-17

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이런 사소한 일로 더 이상 감정소모 하기 싫다고. 짜증을 담아 물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부터 주변엔 눈에 띄게 정적이 감돌았고끝내는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마자 수근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라는 이야기가 귓가로 흘러 들어오면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그 면상에 생수라도 끼얹었으면 이렇게까지 열불이 나진 않았을 텐데.까맣게 타다 못해 잿더미가 된 속에 냉수를 들이부었다. 오냐오냐 대해줬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나오는구나.이래서 연하는 안돼.주변에서 뜯어말리던걸 귀 막으면서 '우리 애는 다르다'고 말했던 게 후회됐다.욕 처먹겠네, 이거.한숨이나 푹 쉬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아침부터 꿀꿀하게 하늘이 흐리더니만 곧 창문에는 물자국이 길에 늘어졌고토해내듯 쏟아지는 ..

스터디 2024.11.08

https://www.youtube.com/watch?v=3tatt4NZwLA 손 끝이 차츰 시리기 시작하는 계절. 언제나처럼 네 손을 잡아봤지만 손가락 끝엔 애매한 열감만 남아있었다.검지로 네 손바닥을 살살 간질이면 한참을 손장난을 치다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옭아매 깍지를 끼던. 별 의미 없지만 사소한 게 다 즐겁고 좋았던 계절은 한참 전에 지나쳐왔다. 손이 잡고 싶을 때면 무의식 중에 했던 버릇이, 손을 잡고 있으면 놓기 싫다던 욕심이 차츰 식어간다. 날이 추워지면 그냥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지금은 잡는 편이 분위기상 맞는 것 같아서.. 구차한 이유가 붙을때마다 손 끝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라도 잡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연결될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걸..

스터디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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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밖에는 눈발이 흩날렸다. 눈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교실의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들었고 양 옆 반에서도 비슷한 녀석들이 있었는지 의자와 책상 밀리는 소리가 잠시 요란하게 일었다. 눈사람과 눈싸움이라는 단어가 시끌시끌하게 오갔고 발 빠른 누군가는 벌써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첫눈인데 그만큼 쌓이기나 할까.. 싶었지만 사실 빌미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수능까지 끝난 지금, 뜨끈하고 나른한 교실에서 애매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와중에 하늘에서 흩뿌려지는 이벤트. 공부는 더 이상 하기 싫고 세 번이나 본 영화는 지루했고.. 수능 성적표가 나오지 않아 '아직은' 조금 더 천진할 수 있었다. 히터 열기에 잔뜩 따끈해진 뺨 위로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온 찬 바람이 나앉았다. 적당히 제 뒷목을 간지럽히는..

스터디 202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