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감자장군 2024. 11. 15. 03:52

평소 제 집 드나들듯 벌컥벌컥 열어재꼈던 보건실 문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지간히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말이라는 건 마음먹은 순간부터 긴장되는 일이 아니던가. 마냥 천사 같은 선생님을 속여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 그렇지만 내 최애의 출근길은 직접 보고 싶은 간절함. 두 감정 사이에서 옥신각신 고민하면서 꾹- 눈을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활동이 끝나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내 곁을 떠나야만 하는 최애의 남은 순간들을 최대한 눈에 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실물은 딱 한 번만 보기만 하면 만족하고 끝일줄 알았던 먼 옛날의 헛소리는 이미 집어던진 지 오래다. 실제로 보면 더 잘생겼는데 화면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스케줄 하나, 콘서트 하나, 공연 하나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예고에도 없던 공개 라디오 깜짝 게스트라니. 라디오 생방은 8시. 출근은 6시. 그리고 7교시가 끝나는 시간은 5시 10분. 아슬아슬하게 도착은 하겠지만 좋은 자리는 분명 다 뺏길게 분명했다. 순간 옆 반 주연이가 얼마 전에 해준 얘기가 뇌리를 삭- 스쳐 지나갔다. 꾀병으로 보건 선생님한테서 확인증을 받아내고, 병원에 간다는 구실로 학교를 탈출했다던 장황한 탈출기. 출처를 모르니 성공확률이 있을지도 예상불가였지만 지금은 방법 하나하나가 아쉬웠으니까. 중간고사가 곧이니 최대한 야자에 빠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침 조회시간 선생님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완벽하게 연기할만한 구실을 찾느라 바쁜 미운 열일곱 살이었다.
 
오후 3시 즈음에 나간다면 떡을 치고도 남을 거라며 사전 밑밥을 깔기 위해 1교시가 끝나자마자 보건실을 찾아가 복통을 구실로 약을 하나 받아왔다. 그리고 이후의 계획은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않고 찾아가 물주머니 빌리기. 마지막으로 5교시가 끝나고 찾아가 끝내주는 연기로 확인증을 받아내기. 완벽한 개연성, 완벽한 복선회수. 이런 시나리오를 짤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에 갔을 거라는 옆 분단 수영이게 삐죽이며 주먹을 내보였다. 점심시간에 한 번 더 찾아갔을 때 보건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걱정이 잔뜩 담긴 손길로 등을 쓸어주셨고, 따뜻한 물주머니까지 꼬옥 쥐어주셨다. 솔직히 마음이 콕콕 쑤셔서 선생님 눈을 쳐다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착하고 마음 여리고 따뜻한 우리 선생님 걱정이나 하며 교실에 돌아와 마지막 피날레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지금, 고지를 눈앞에 두고서 가장 완벽하게 흘러갈 장면만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시킨다.
 
"어? 유민이구나? 지금.. 6교시 시작하지 않았나?"
"아.. 네에 그. ..배가 계속 아파서.."
"아이구.. 아침부터 그러더니 아직도 그럴까 왜.. 여기 와서 누워볼까?"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어깨와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서 지익-지익- 실내화 끄는 소리를 내며 걸어가 구석 한켠 침대에 느릿하게 누웠다. 본론을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긴장돼서 심장이 콩콩콩 뛰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착한 선생님은 어느 쪽이 아프냐며 제 배를 살살 짚어보기 시작했다.
 
"여기 눌렀을 때 어때?"
"어.. 조금 답답해요.."
"그럼.. 여기는 어때?"
"... 쿡쿡 찌르는 것 같아요.."
 
어지간해선 배탈도 안나는 건강 체질을 원망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프지도 않은 걸 아프다고 지어내서 말하려니 예상 못한 난관이었다. 적어도 어디 눌렀을 때 어디가 아프다고 정리는 하고 올걸. 기출 범위 밖 문제에 혼돈이 온 와중에 제 등을 받쳐 일으켜 준 선생님은 어느새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제 손을 조물조물 주물러주기나 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두 번은 못할 것 같다며 속으로 우는 소리나 냈다.
 
"속이 안 좋을 때는 이렇게 손을 꾹꾹 눌러주는 것도 좋아~ 근데 약을 먹어도 안 듣고.. 물주머니도 소용이 없고.. 어쩜 좋지.."
".. 그, 그러게요. ..저, 선생님 저 아무래도 오늘은 병원ㅇ,"
"체 한 것 같은데 우리 손 한번 따볼까?"
"네?"
 
이쁘게 웃는 입에서 전혀 예상 못한 말이 나오자 사고가 뚝. 멈춰버렸다. 와중에 급체로 진단을 내린 건가요? 고작 그걸로는 병원에 갈 구실이 안되는데?
 
"저, 체가 아니라 그, "
"아무래도 학교라서 손 따기는 조금 그런가~? 그래도 효과는 제일 직빵인데 말이야~ 활명수는 있으니까~"
"..."
"소화제랑~ 활명수랑 한 번 더 먹어보구 선생님이랑 운동장 한 바퀴 돌자? 너무 앉아있기만 해도 잘 얹히거든. 오늘 날씨도 좋은데 너무 잘됐다 그치? 벚꽃도 이쁘게 피었는데 말이야~"
 
다정히 활명수 뚜껑을 따주고서 손수 쥐어주시기까지 하는 모습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악의라고는 하나 없는 걱정과 진단. 요즘 같은 세상에 앉아있지만 말고 같이 나가서 걷자고 하는 선생님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 마음이 몽글몽글 포근포근해지는 따뜻한 말임에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꾀병인 거 들켰어..'
 
건물 5층 어딘가의 교실에서 내려다본 선생님과 학생의 산책은 참 보기 좋았지만 누군가들은 직감했을 것이다.
1학년이 또 속았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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