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름 13

수신인 불명

https://youtu.be/_fd_hwSm9zI?si=MdukS1F3tB8PxCJ4 진동과 함께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비닐 팩 하나에 담겨있는 까맣고 걸쭉한 액체를 컵에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맛이었다.좋은 것들만 넣어 달였다는데. 왜 몸에 좋은건 이토록 쓴 지, 먹을 때마다 적응 안 되는 맛을 이겨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이미 손은 서랍 안에서 사탕을 찾고 있었다.다급하게 입에 밀어넣고 5초, 달큰한 사과향이 목과 코로 넘어오면 그제서야 깊은 숨을 들이내 쉰다.뉘엿 해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 옆에 걸터앉는다.여름의 끝물인 지금. 해가 지면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을 오싹하게 훔쳐간다.거리의 사람들은 제각기의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

세 번째 여름 2025.01.20

흉내

통통.. 턱턱...매끄럽게 이어지지는 못하고 도중 퉁- 하고 나무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가 섞였다... 옆에서 봤을 때는 쉬워 보였는데... 칼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던가. 힘을 꽉 주어 쥔 탓에 오른손이 약간 바들거리기까지 했다. 항상 받기만 했지.. 직접 하는 건 역시 어렵구나. 식사 전, 언제나 너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지만... 방 너머 침대에 누워있을 너의 존재가 새삼 소중해졌다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고 받기만 할 수는 없지. 갚자, 은혜- 그리 생각하며 옆에 있던 양파를 집어 들었다. 버섯이랑 감자 조금.. 그리고 죽에 또 뭐가 들어가더라. 언젠가 네가 해줬던 죽을 떠올리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귀찮다는 이유로 끼니를 거르고 쉽게 속이 얹혀버려서 제대로 된 밥이 되려 어색했을 때 잔소리보다도 효과적..

세 번째 여름 2024.09.17

偶然

IF.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다. ( = 뭘 하고 싶은지 여전히 스스로도 모른다.)얇고 길게 사춘기가 이어지고 있다. 우연(偶然) : 아무런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  계단을 내리는 발걸음 소리는 급했고 조금은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누군가를 찾는 듯 도중 빈교실을 기웃기웃 쳐다보기도 하고, 제 핸드폰을 켜 중간중간 시간을 확인했다. 유학생, 심지어 신입생한테.어딨 는지도 모를 학생을 찾아오라는 게 말이 돼?겨우 그 작은 나라 출신이라는 공통점 가지고. 같은 한국인이라고 뭐 다 구면인 줄 알아?  어지간히 화가 나더라도 구겨질 일 없던 미간이 조금은 좁혀졌다.유학생이 많다고 홍보를 할게 아니라 행정실 인력을 교체하던가.작게 곱씹으며 마저 계단을 내렸다. 적어도 과라던..

세 번째 여름 2024.09.12

미확인 메시지가 2개 있습니다.

[진이야, 나 영국 가.] [.. 사실 내일 출발이야.] 아침과 점심 그 애매한 사이, 간만에 느지막이 자고 일어났을 때 카톡 알림이 울렸다. 지금 한국은 8시쯤 됐으려나-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다가 저가 제대로 글을 읽은 게 맞는지 한참 눈을 비비고 안경을 고쳐 썼다. '성우, 너는 왜 그런 말을 왜 이럴 때에..' 설레발치지 않는 성격임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물론 네 마음을 완전히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워낙 남 먼저 위하니까.. 혹시라도 연일 제쳐두고 올까 봐. 너의 배려였을 테지. .. 그래도 내가 영국에 있는데. 놀라움 다음은 아주 잠깐의 원망, 그다음은 괜히 간질거려 툭 튀어나오는 타박. 아마도 내일.. 오후 즈음이면 도착하려나. 시험은 4시쯤 끝나니까....

세 번째 여름 2024.09.06

다시, 여기

고되고 알찬 하루였다.동네를 한 바퀴 돌고, 해안가를 걷고, 나름 충격적이었던 무화과 탕후루까지.동창회라더니... 정말 여전히 특이한걸 시켜..그래도 재밌었으니까.. 간만에 오래 이야기도 할 수 있었으니까.. 4년 만에 오는 집이었다.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상전이었던 너는 나를 알아봐줄까..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던 순간만큼이나 긴장했던것도 같다.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비비는 모습에 괜한 걱정임을 알았지만 말야. 당연히 익숙해야할 제 집이지만 조금 낯선 기분.오히려 저가 아주 간만에 오는 손님이 된 기분.한참을 두런두런- 따뜻한 안부를 주고 받았다. 방으로 돌아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면 그제서야 피로가 몰려왔다.발바닥이 웅웅- 비명지르고 홧홧하게 제 존재..

세 번째 여름 2024.09.02

오늘의 날씨는-

영국의 날씨는 언제나 제멋대로다. 우산을 챙기면 그저 하루종일 찝찝하게 흐리기만 했고간만의 맑은 날이 반가워 가방을 조금 가벼이하면 변덕스레 비가 쏟아졌다. 기분 낸다고 흰 원피스를 입는게 아니었는데..바보같이 들떠서는 평소라면 안했을 실수를 했다.... 다 젖었네. 여름의 끝물이라지만 생쥐꼴이 된 지금은 조금 오한이 들 지경이었고.이대로 가다간 언제가처럼 지독한 감기에 걸릴라..운이 좋았던걸까.비를 막 피하려 서있던 곳은 마침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라서 홀린듯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머리 끝부터 젖은 제 모습을 보고 놀랐는지금새 저에게 담요부터 둘러주던 사장님은 어쩐지 할머니 생각도 들게 만들었다.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주문하고서 안쪽의 소파로 자리를 잡으니 그제서야 창 밖 풍경이 보였다... 많이도 내리..

세 번째 여름 2024.08.27

눈에는 눈

"....정말로, 미안해." 종국에는 듣고야만 그 문장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네 것과 똑같은 제 몫의 머그잔만 만지작댔다. 왜 저를 쓰다듬지 않냐고 네 발치에서 머리만 꾹꾹 들이미는 이니를 바라봤다.동물들이 참 잘따르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던데, 틀린 말도 아닌가보다.심란한 마음에 잠시 딴 생각으로 환기를 시켰던 것도 같다. "..치치 얘기할 때. 성우 행복해보여서.""그래서 난 둘의 안부가 항상 궁금했어." 성우가 이니를 이뻐하는것처럼.종종 어떤 간식을 좋아하는지 묻는것처럼-내 마음도 그랬어. 가만 네 얘기를 들으면 더더욱 저가 이 사과를 받는게 맞는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굳이굳이 따지면..남을 과하게 위한다는 점. 그것도 아니라면 네가 섬세하다는 것. 그것도 아니라..

세 번째 여름 2024.08.26

고양이 손이라도-

"이니, 좀 내려와줘." 엎어진 제 등 위에 올라 타 평화롭게 식빵이나 굽는 고양이를 툭툭 건드렸다.3년 전 마냥 가볍지 않아- 등이 뻐근해질 것 같지만 모질게 내치지는 못했다.여즉 내려올 생각이 없는지 골골 거리기까지 하면 베개에 푹- 고개만 기댈뿐이었다.이러고 있으니까 조금 심란한 사람 같잖아.물론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어떤 말을 했을 때 아차- 싶었다던가, 뱉은 말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다.적어도 그제까지는 그랬다. 넌 언제나 이니를 이뻐했으니까,곤란할 법한 제 부탁에 같이 고민해주고 선뜻 이름까지 지어줬으니까.이니가 제 가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너에게 가장 먼저 전했었고어쩌다보니 가끔- 사실 어쩌면 자주 서로의 집에 있을 작은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했으니까. 아주 간만에 공부 얘기가 아닌 ..

세 번째 여름 202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