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름

흉내

감자장군 2024. 9. 17. 03:22

통통.. 턱턱...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못하고 도중 퉁- 하고 나무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가 섞였다.

.. 옆에서 봤을 때는 쉬워 보였는데... 칼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던가. 힘을 꽉 주어 쥔 탓에 오른손이 약간 바들거리기까지 했다. 항상 받기만 했지.. 직접 하는 건 역시 어렵구나. 식사 전, 언제나 너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지만... 방 너머 침대에 누워있을 너의 존재가 새삼 소중해졌다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고 받기만 할 수는 없지. 갚자, 은혜- 그리 생각하며 옆에 있던 양파를 집어 들었다. 버섯이랑 감자 조금.. 그리고 죽에 또 뭐가 들어가더라. 언젠가 네가 해줬던 죽을 떠올리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귀찮다는 이유로 끼니를 거르고 쉽게 속이 얹혀버려서 제대로 된 밥이 되려 어색했을 때 잔소리보다도 효과적인 네 침묵과 걱정 어린 눈빛, 정량보다 조금 적게 떠 준 따뜻한 죽. 입에 뭔갈 넣는 게 부담이었지만 먹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속이 편했더랬다. 간장 조금이랑.. 참기름도 들어갔던가. 옆에서 보면 항상 뚝딱뚝딱 만들던데.. 역시 지켜보는 걸로는 네 발 끝에도 못 미치나 보다.

 

양파의 매운 기운이 눈을 괴롭히면 아주 잠깐 표정을 찡그렸다... 그래도 네가 묵직한 몸을 이끌고서 서있는 것보다는.. 얼른 뭐라도 먹이고서 약까지 먹이고 그다음에 푹 재우면 좀 나아지려나. 의대생이라고는 하나 할 수 있는 건 손에 꼽았고 막상 누군가 옆에서 아프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벼운 감기라 해도.. 한 술이라도 떠주면 좋을 텐데.. 내 죽이 들어갈까. 코 끝까지 매워져서 고개를 잠시 뒤로 젖히며 평소에는 잘 안 하던 고민을 했다. 이거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어.

 

참기름에 야채를 쏟아부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과 기름이 튀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했다. 혹 죽을 태우기라도 할까 불을 약하게 죽이고서 야채를 살살 볶았다. 무서운게 아니야, 그냥 조금 놀란 거야.. 그리 생각했지만 불린 쌀과 물을 다시 냄비에 부을 땐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했던 것도 같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대로 후드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를 문득 올려다보며 천천히 죽을 저었다. 죽이라고 하기엔 되직하지 않고 너무나도 가벼운.. 그래, 꼭 희멀건한 국에 가까운 모양새였지만.. 조금 더 끓이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나 잠시 했다. 간이 조금.. 싱거운가... 아냐, 이것도 조금 더 끓이면 괜찮을 거야..

 

억지로 먹어달라는 욕심은 감히 부리지 않을거지만 네 속이 조금은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약만 챙겨주는 건.. 어쩐지 내 손이 민망하달까. 받았던걸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처음 네 죽을 한 입 먹었던 그땐 꼭 마법 같았거든. 감기는 조금 제쳐두고서라도 먼 타지에서 먹는 익숙한 맛은 살짝 과장 보태서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거든. 게다가 요리 잘하잖아, 성우. 역시 애매하게 따라 하는 걸로는 그 맛이 안 나네- 생각하며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조금 덜어 담았다. 그리고 네 감기 좀 나아지면.. 역시 요리를 조금 알려달라고 할까, 싶다.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두 번 내어주는 건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언제나 받기만 하는 것도 미안한걸.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 작은 테이블에 수저와 어디서 본건 있는지 장조림 따위의 가벼운 반찬까지 올려두고 나면.. 모양새는 퍽 그럴싸했다. 이제 메인은.. 굳게 닫힌 방문을 빤히 쳐다봤다. 밥 먹자- 하던 초저녁의 네 말을 흉내내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입이 안떨어지는지.. 꼭 뭔가 잘못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괜히 긴장이 되어서는.. 네 방문을 통통-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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