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코르셋은 미용을 목적으로 허리를 조이는 복대 형태의 기능성 속옷이었다. 지금에서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 인식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가녀리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신체의 여성을 최고 미의 상징으로 여겼다나. 갈비뼈가 부러지고 숨을 쉬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격정의 시대를 살던 귀족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를 꽉 졸라맸다고 한다. 그리고 21세기, 프랑스에서 10시간 하고도 한참 날아와야 하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옷에 사람을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잠깐만! 야야, 야. 잠깐만!! 살! 살 찝혔어!!"
"아~! 될 수 있었는데!"
"염희수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유하~ 오늘은 드레스 피팅하는 날~ 이번 영상의 협찬 브랜드가 궁금하다면? 구독, 좋아요, 알람까지~"
동창들과 함께 큰 파티에 참석한다는건 참 기쁘고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졸업을 하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까이 지내고 있는 거냐며 누군가들은 부러운 소리를 냈을 테고 또 누군가들은 멋진 정장이랑 드레스를 입고 가는 거냐며 눈을 반짝였지만 막상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유튜버가 연예인 못지않은 선망의 직업이 된 요즈음, 억 소리 나는 구독자와 팔로워들을 거느린 sns 셀럽과 인사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저들의 친구 세이도 당당히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셋은 운 좋게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딱 여기까지는 참 훈훈하고 보기 좋은 이야기였다. 정장 입을 일은 딱히 없었던지라 의진에게 애용하는 브랜드가 있느냐하고 물어볼 적에 의상 대여는 걱정 말라던 세이의 말을 듣고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다. 파티 참석 2주 전, 카톡으로 주소와 시간만 쏠랑 보내고선 맞춰오라는 공지에 장정 셋은 드레스 숍 앞에서 한 치 의심도 없이 어깨만 으쓱였고, 그저 자칭타칭 주인공의 드레스 피팅쇼에서 리액션을 해주는 씬이 과연 영상에 몇 분이나 담길까하는 내기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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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세이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브랜드 이미지 실추로 고소 먹는다고 이거."
"글쎄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 먼저 컨택 주신 거라고~ 요즘 같은 세상에, 드레스 입은 여자가 정장 입은 남자 셋 거느리는 진부한 신데렐라 역하렘 영상이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드레스 입은 남자 셋 정도는 있어야 조회수가 터진다고."
"괴물이 다 됐네, 저거.."
"저기 봐. 권재하랑 차의진은 이미 받아들였다고. 얼마나 보기 좋아. 청순, 섹시 컨셉 찰떡이지. 내 픽이지만 참 잘 골랐어."
그 말과 함께 저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를 옆 쪽으로 스윽 돌리는 세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받아들였다고 해야 할지, 기운을 뺏겼다고 해야 할지. 반쯤 너덜 해진 장정 둘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스퀘어넥에 시스루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결혼식 피로연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던 드레스. 샤넬, 프라다 저리 가라 하는 올 시즌 회심의 역작으로 만들었다는 파격적인 이브닝드레스. ... 를 입은 재하와 의진이었고. 유튜브각을 제대로 잡은 세이는 셔츠에 튜브탑과 벨트로 포인트를 준 세미 정장을 입고서 홀로 생기와 활동성을 독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문제아는.
"그래서 염희수. 그 흉한 꼴은 언제쯤 거둬줄래. 속이 상당히 거북하거든."
"확실히 좀... 그렇다 희수야."
"다시 말하지만 그게 이 숍에서 제일 큰 드레스라는거 있지 마~"
"하..."
요즘 인기를 최고조로 찍고 있는 아이돌이 연말 시상식에서 입고 나오면서 이 브랜드의 효자가 되었다는 그 드레스. 실크 원단으로 고급스러움을, 리본과 프릴로 귀여움을, 과감한 오프숄더 디자인으로 반전 매력을 자아낸다던 그 드레스. 이 숍에서 가장 큰 사이즈라면서 제 날개뼈 위로는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그 드레스. 등판을 훤히 드러내고 주저앉게 만들어 갖은 욕은 다 먹게 만드는 그 드레스. 살면서 제 근육을 원망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고작 드레스 시착이 뭐라고 땀까지 만드는지. 질려버렸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드레스를 붙잡고서 다시 일어나는 희수였다. 시상식의 여배우들이 인사할 때 꼭 가슴께를 가리는 것마냥 자동적으로 손을 올리니 저 한 구석에서는 질색하는 소리와 원성이나 들려왔고 와중에 또 한쪽에서는 뒤집어질 듯 웃는 소리나 내었다.
"이번엔 진짜 입고 만다.. 재하야, 진짜 마지막. 아, 차의진 쫌. 나도 싫어. 도와주라 제발."
"하하.. 우리 진짜 이거 입고 파티 가야 할까.."
"이 짓까지 하면서 입었는데 파티에 안 가면 그게 무슨 의민데."
"요즘 핫 하다는 그 드레스! 과연 지퍼는 견뎌줄지? 영상 마지막까지 뒤로 가기는 금지~"
표정만 보면 올림픽 결승 무대였고,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수술의 현장이었고, 이번 분기 업계 실적 보고의 현장이었다. 최대한 숨을 들이켜 복부와 허리의 살과 근육을 수축시키면 등 뒤에서는 원단을 힘껏 끌어모았고 지독하리만치 올라가지 않는 지퍼를 끌어올리려 부들부들 거리는 여린 누군가의 팔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퍼를 잠그겠답시고 29살 먹은 동창 셋이 엉겨 붙어 고함과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조회수 이전에 그저 십 년은 족히 우려먹고도 남을 안주감이었다. 오늘만 해도 날개뼈 부근에서 몇 번이고 좌절했던 지퍼도 이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했는지 서서히 고지를 향했고 마침내 완벽하게 다물린 뒤판은 저들에겐 감동적이었지만 어쩐지 한 켠으로는 드레스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됐다! 희수야 됐다.!"
"숨 쉬지 마, 염희수. 숨 쉬지 마!"
"야... 나, 나. 갈비뼈..."
"하하하! 턴! 한 바퀴 턴까지 돌아줘야지, 빨리!"
숨 쉬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와중에 턴은 무슨 턴. 원망은 깊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고작 턴 한 바퀴가 뭐 어렵겠냐며 겨우겨우 발을 떼고서 울그락 풀그락한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감독의 지시에 따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더는 못 참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아주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실낱같은 희미한 숨을 내쉬었을 때 개복치 같았던 등판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기가 막힌 타이밍에 파업을 선언했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 돌아온 것은 분노 담긴 아우성과 실성의 웃음, 한 건 잡았다는 쾌재. 그리고 29년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아니 어쩌면 남은 인생에서도 이보다 더 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을 안겨주는 수치심이었다.
그리고 역대급 조회수를 기대하며 올라간 동영상이 노란 딱지를 먹고 덩달아 지대한 욕을 홀로 먹은 건 아주 조금 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