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J6aCh3QOs?si=r1xa33DnD8MxhD1R
엄밀히 따지고 보면 키타가와 아키라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날에 학교에서 내심 걱정을 해도 집에 갈 즈음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개었고, 깜빡 잊은 문학 숙제를 어떤 빌미로 미뤄 제출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시간표가 급히 바뀌기도 하고, 여름이면 사흘에 한 번씩 가리가리군의 '한 개 더!' 막대가 나오는 건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꼭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한 게 어깨가 절로 으쓱였지만 이젠 열아홉이나 먹었으니 어디 가서 사사건건 자랑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저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었기에 새롭게 놀라울 일은 거의 없었다. 어지간한 행운 넘치는 일은 근 10년 간 다 겪었던 것도 같다. 복에 겨웠다고 누군가는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남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욕먹기 싫다기 보단.. 내가 진심으로 노력해서 이뤄낸 일마저 하찮은, 어쩌다 얻어걸린 '운'으로 치부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재수 없다고 한 소리 듣게 더 나았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세상이 제 것일 것 같았던 키타가와 아키라의 일상에 언젠가부터 삐그덕.. 하고 어그러지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첫 단추를 잘 못 꿰면 다음 할 일 마저 밀리고 밀린다는 걸 최근에서야 몸으로 깨달았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운동화 끈이 현관을 나서자마자 풀려버렸고, 언제나 10분 정각에 타던 버스를 놓쳐버렸다. 겨우 겨우 지각은 면했지만 분명 어제저녁에 꼼꼼히 해둔 숙제를 집에 두고 온 탓에 선생님께 한 소리 들었고 사방에서 들리는 쿡쿡 웃음소리에 이를 뿌득 갈았어야 했다. 남에게는 일상이라고 여겨져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하루가 유독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이유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숙제는 진짜 했다고!!' 방과 후에 벌청소를 하다가 재수 없게도 연극부 부원에게 딱 걸리기까지. 물론 이건 일방적으로 도망 다닌 그의 업보였지만.. 그저 하루에 이 많은 일 들이 겹치고 겹치니 그저 억울한 비명만 질러댈 뿐이었다. 문화제까지 꼬박 3개월이 남았으니 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는 협박 섞인 약속을 빌미로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뜯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아침부터 고단했던 탓에 오늘은 가게 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며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이어폰에서 꽝꽝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노래 탓에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마지막 불운을 알리는 비명 소리가 묻혔다.
쾅-! 우당탕! 하는 소리 뒤로 유리 깨지는 파열음. 곧 자전거의 바퀴가 홀로 끼리릭 끼릭- 헛도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새하얗게 점멸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온다. 괜찮냐며 저를 걱정하는 듯한.. 검은 머리에.. 우리 학교 교복. 그리고 그 사이를 포로로- 가르는 꽃잎. 존재를 인식함과 동시에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꽃 향기, 풀 내음, 흙냄새 덕에 단박에 저에게 닥친 마지막 불운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깨달았다. 불운에서 이 녀석을 빼놓으면 아니, 이 녀석에게서 불운을 빼면 시체였으니까.
"사람이 지나가는데 안 멈추고 뭐 하는데?!"
"브레이크가 갑자기 안 들었단 말야~ 게다가 난 언덕에서 내려올 때부터 계~속 아키라 이름 불렀는걸? 아키라도 못 들었잖아!"
뜨끔. 양심 한 구석이 찔렸다. 그리고 여즉 시끄럽게 노래를 뱉어내는 이어폰만 휙휙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루종일 불운만 차곡차곡 쌓이는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둘 중 누구 하나 피 본 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대차게 구른 덕에 엉덩이는 서서히 아파왔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사방에서 팔랑거리던 꽃잎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꽃을 대체 얼마나 실어 날랐으면-'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깨진 화분에 잔뜩 뭉그러진 꽃 바구니까지.. 그리고 또 뭐가 좋다고 방긋방긋 웃고나 있는 이 화상 덩어리, 아야세 슈토까지.
"이거 너네 삼촌 심부름일 거 아냐! 웃음이 나와?"
"응? 아~ 물론 혼나기야 하겠지만.. 내가 일부러 이런 게 아니니까. 이제 가서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지. 우리 삼촌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닌걸-"
쓸데없이 둥글둥글해선.. 일상이 불운이 투성이인 아야세 슈토라는 남자아이는 이 난리가 벌어졌을 때부터 계속 웃고만 있었고, 키타가와 아키라는 제 앞에서 속 편히 앉아있는 슈토가 영 신경에 거슬렸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의 반은 제 책임임에도. 길바닥에 언제까지 앉아있을 거냐고 타박하는 소리를 내며 사방에 흩어진 꽃과 흙을 한 곳으로 그러모으면서 속을 삭혔다. '얘네 삼촌 가게에 나도 같이 가야 하나. 나랑 안 부딪혔으면 이럴 일도.. ..아닌가. 저 녀석이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혼잣말이나 중얼중얼거리고 있을 때 즈음 손에 잡히는 메리골드 꽃송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긴 부딪히지 않았으면 이렇게 망가질 일도 없었겠지. 괜히 미안해져서 작은 꽃송이에 나앉은 흙먼지를 톡톡 털다가 제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정리하던 슈토와 눈이 딱 마주쳤다. '.. 그러보니까 이 녀석 눈이 꼭...'
"아키라 꽃이랑 잘 어울리네-"
".. 뭐?"
"아키라는 메리골드보단 데이지려나- 어, 흙 묻었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가 하더니 갑자기 제 뺨을 손으로 쓱 훔치는 슈토를 얼빠진 얼굴로 쳐다나 봤다. '하여간 아키라도 칠칠치 못하다니까~'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갔다가.. 휘파람을 불며 속 편하게 자전거를 바로 세우는 저 얄미운 뒤통수를 쏘아보며 홧홧해진 볼을 벅벅 문댔다. 졸업까지 저 녀석과 이 지경으로 지낸다면 분명 병원에서 부정맥을 진단받을 거라고 아키라는 확신했다. 선선해지는 이 날씨에 갑자기 더워질 일도, 줄곧 평온했던 심장이 빠르게 뛸 일도. 분노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저 녀석이랑 부딪혀서 이 지경이 난 거라고 애꿎은 곳에 화살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전 학교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천 엔짜리 지폐를 찾았다고 사진 찍어 보내온 슈토의 문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아키라의 미간에는 내 천 자가 그려졌다.
[간수 잘해라. 쉽게 얻는 건 쉽게 잃는 법이다.]
[그거 혹시 아키라 얘기야?]
[야]
[야]
[야]
[나와. 임마]
[오늘은 진짜 싸우자.]
[wwww 자야지]
근시일 내에 고혈압까지 얻을 것 같다며 뒷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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