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https://youtu.be/qkGJJymr93s?si=gJiHiNA3BstuYy-Q
자그마치 삼 년만의 연락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은 어제도 널 보았지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빛 소식을 안고 귀국한 넌 이 좁은 나라에서 요즘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고. 이례적인 사건이라며 세계 각지에서도 네 이름과 사진을 포스터와 전광판에 띄우기 바빴으니까. 졸업하기도 전에 유학을 가겠다고 떠나더니 기어코 학교 정문에는 며칠 가지 않아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내걸리며 요란스럽게 널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분에 관계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너에게 말을 걸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그 영광스러운 손과 악수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와중에 학교 인터뷰며 행사며, 심지어는 이사장님의 식사 자리까지 한사코 거절했다는 소문은 금세 학교에 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뜨거운 감자라고 해야 할지 태풍의 눈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는 이 유명인이 누구와 만나는지가 학교 안에서는 알게 모르게 화제였다. 모두의 관심을 사고 기쁨을 누리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혹시 CC라서 일찍이 등교한 게 아니겠냐는 풍문까지 나돌기 딱 좋았다.
[D105호에서 보자.]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P]
잘못 엮이면 졸업까지 뜬소문에 휘말려 골치 아파지는 건 나인데도. 물론 이미 입학부터 최근까지, 게다가 네가 없는 삼 년 동안 난 네 이름 석자에 매일매일이 스트레스였지만 말이야. 남들이 보기엔 아주 각별해 보였던 우린 중학교 시절부터 쭈욱 함께였고 난 이 점이 특히나 싫었다. 피아노를 먼저 시작한 것도 나, 너에게 처음 알려준 것도 나. 그렇지만 1등은 너, 대상도 너, 수석도 너. 14살 전까지는 건반에 손도 안대 봤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일 게 분명한 너는 나에게 벼락이나 외계인보다도 더 최악인 존재였으니까. 네가 유학을 떠나고서부터 1등은 자연히 내 몫이었지만 순전히 비워진 공석을 매우기 위한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력보다도 운이 좋았다는 뒷말은 내내 꼬리표가 되었고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한 편, 네가 다시 돌아오면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싶다는 열망 또한 불탔지만 뉴스속보에 마저 띄워진 네 업적에 난 횃불도 불쏘시개도 아닌 멍청한 불나방에 그쳤다는 걸 시름시름 앓아가며 인정한 참이었다. 보기 좋게 비웃을 셈으로 독방에 불러내기까지 하는 거냐며 괜히 계단에 신경질을 내며 걸어가는 와중에도 이 구관 건물에 마저 누군가 있지는 않을까 버릇처럼 뒤를 돌아보며 원수를 찾아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 건넜다.
101호, 102호.. 문이 꼭 닫힌 방음 연습실들이 즐비한 복도를 거닐며 유리창 너머로 다른 학생들이 있을까 좀도둑마냥 훔쳐보고 있으면 청개구리마냥 홀로 열린 문 사이로 제 존재를 과시하듯 비집고 나오는 공명하는 소리에 기겁하며 걸음을 보챘다.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괜히 식은땀이 나고 홀로 전전긍긍하는 모양새가 신경질이 나 잠근 문에 기대 뿌드득 이를 갈았다. 뭐가 좋다고 웃어 저건. 손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콩쿠르에서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웬 바보 한 명이 웃는 소리가 덩달아 세 평 남짓한 공간에서 함께 울렸다. 인정하기 싫어도 소리는 참 제 취향이었기에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대로 머릿속은 조금씩 차분해져 오면 방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이내 다시 웃는 소리, 그리고 가죽 시트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면.
"오랜만이다 그치?"
"어."
"더 자주 연락하고 싶었는데 정신이 조금 없기도 했구~"
"아주 호주에서 살지 그랬냐."
"헤헤 왜애~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지우 너 보고 싶었는데~"
"낯간지럽게 왜 이래.. 안 보고 싶었는데? 그냥 군대까지 가버리지 그랬냐?"
내쳐도 달라붙는 시골 강아지마냥 헤헤 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속에서 화르륵 불이 붙는 듯했다. 예술하는 애들은 예민하고 날카롭다는 말은 그저 저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였고, 모난 구석 없이 둥글둥글한 녀석은 누가 봐도 그저 착하고 순해빠진 바보였다. 악의라곤 없는 재능 덩어리.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는 요령 없이 성실한 모습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열심히, 꾸준히, 잘. 제 손으로 일궈내 제 이름 앞에 붙여놓은 반짠반짝한 수식어들이 참 부럽고 질투 난다. 피아노가 아니었어도 무슨 일이든 난 멋대로 네 이름을 끌고 와 저울 건너편에 얹어놓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 비참 해지는 건 오롯이 제 몫이었다.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게 널 동경한다느니 부러워한다느니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감히 라이벌이라는 단어조차도 쉽게 쓸 수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꾸욱 눌러 깊게 패인 자국을 낼 때, 다시금 툭툭- 하고 빈 의자 자리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우리 오랜만에 그거 하자, 지우야."
".. 나이가 몇인데 그걸 해. 유치원생들도 눈 감고 하는 걸."
"왜~ 지우가 알려줬잖아-"
"그럼 더 있어 보이는 걸 고르든가. 누가 보면 내가 이거만 알려준 줄 알겠네."
"헤헤 그래도 난 이게 제일 좋아."
"..."
14살일 땐 함께 앉아도 넉넉히 남았던 의자가 이제는 바짝 붙어 앉아도 아슬아슬 모자란 꼴이 퍽 웃기기도 했다. 어정쩡하게 걸터앉아 내 자리 하나 간수하기 어렵고 선뜻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것도 머뭇거려질 때 왼팔을 걸고서 바짝 이끄는 힘에 못 이겨 어깨끼리 쿵- 하고 잠깐 부딪쳤고 얼마 안 가 해머마저 현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린다. 십 년 전 내가 앉았던 자리에 네가 앉고서, 그때는 도랑 미도 구분 못했던 진짜 바보가 얼른 따라오라며 부드럽게 재촉하는 소리에 홀린 듯이 오른손을 건반 위로 올려 파샾에서부터 천천히 손가락을 놀렸다. 연습곡으로 쳐주지도 않는 의미도 없는 곡을, 심지어는 연탄곡으로 바꾸어서 치는 이 행위가 얼마나 큰 성적이 되고 성과가 되겠냐마는 다시금 웃는 소리를 내며 종종 제 팔을 툭툭 부딪혀오는 모습은 꼭 우리 처음 만난 그 옛날 음악실에서의 웃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부러 가시 돋친 말을 했지만 사실은 꽤 많이 보고 싶었던 내 단짝은 예나 지금이나 어딜 가서도 나와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여서. 그리고 아무리 네가 세계에서 날고 기어도 이 연탄곡의 리드는 제가 더 잘 어울림이 확실했기에 선심 쓰듯 천진한 웃음과 함께 네 어깨를 꾸욱 밀었다.